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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Culture

사울 레이터의 근원 : 뉴욕의 컬러 A

"내가 마주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전혀 모르겠다.”

 

NEW YORK 1950S -'60S

 1923년 12월 3일,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저명한 유대인 수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사울 레이터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기대받으며 어린 시절부터 신학교를 다니며 우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10대부터 점점 커져가는 그림과 사진에 대한 열정과 엄격한 계율에 모순을 느낀 사울 레이터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기도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본 프랑스 인상파 그림, 먼 일본과 중국에서 그려진 우키요에와 수묵화 등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미술 표현과의 대면은 훗날의 사울 라이터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다'라는 아들의 꿈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버지를 떠나, 1946년 23세 생일 직전, 라이터는 뉴욕으로 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은 그동안 미술의 중심지였던 유럽의 위상을 뿌리째 뒤엎는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큰 물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때마침 사울 레이터가 찾은 새로운 거처는 추상표현주의의 물결이 한창 사회를 휩쓸고 있을 시기, 의욕 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이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환경 속에서 사진이 가진 표현 매체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붓과 함께 카메라로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는 모노크롬 스냅 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Street

"내가 마주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전혀 모르겠다.”

 사울 레이터의 첫 카메라는 10대 당시, 어머니가 사준 DETROLA라는 소형 카메라가 전부였습니다. 사진을 예술적 표현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던 친구 화가 리처드 파우제트 다트를 만나면서 표현으로서의 사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라이터의 사진은 비교적 이른 단계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이었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1953년 '항상 젊은 낯선 자들'전에서 사울 레이터의 모노크롬 작품 5점이 선을 보였습니다. 젊은 작가로서는 순조로운 출발이었지만, 1955년 스타이켄이 감독한 전설적인 사진전 'The Family of Man'전의 출품 제의를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내 인생은 공허한 기회로 가득했다."고 말했던 라이터의 말을 뒷받침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거처가 있는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주변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저층 건물이 즐비하고 고층 빌딩에 가려지지 않는 넓은 하늘, 미묘한 빛의 표정,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공기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순간은 사울 레이터에게 최적의 피사체였습니다. 그의 모노크롬 작품은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어, 기존의 스트릿 사진에 없던 시적이고 환상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내고 있습니다.

 

Artists

 젊은 사울 레이터가 목표로 삼았던 1940년대 후반의 뉴욕은 서양미술의 중심지가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전환하는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표현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예술의 용광로'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초현실주의의 중심인물인 막스 에른스트와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해 유럽에서 많은 전위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전후 뉴욕은 미국의 풍부한 경제력과 유럽에서 유입된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배경으로 추상표현주의로 대표되는 세계 예술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스트 빌리지는 임대료가 저렴해 점차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뉴욕의 서브컬처를 형성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울 레이터가 이스트 빌리지의 주민이 된 것도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비슷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예술가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이 동네에서 사울 레이터는 스냅사진을 찍는 것과 같이 그들의 초상화를 필름에 담았습니다. 촬영된 예술가들의 초상화들은 당시 뉴욕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앤디 워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