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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In the mood for Films

이키루 : 삶이라는 찰나의 순간 속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

11월호 : 퀘벡에는 뭐가 있을까?

 

 

삶과 죽음 사이의 허무주의

이키루

위암이다. 암이라고 얘기해주지도 않는다. 가벼운 궤양이라며 둘러대는 의사의 말에 사형선고가 내려지듯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방황하는 노년의 남자. 도시의 시청에서 30년 가까이 무결근으로 일해왔던 그의 의자는 이제 비워진 채로 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보고자 했지만, 그는 부인과 따로 살림을 차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마시지 않던 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박장이라면 이 아픔을 잊을 수 있을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찰나의 순간 속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영화의 줄거리 및 스포가 포함된 게시물입니다.

이키루 스토리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을 비치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지금 주인공 얘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후 내레이션이 이어집니다.

 

‘그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살 뿐이니까요. 그는 살아있었던 적이 없다. 즉, 진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20년 전에 죽었다. 살아있었다면 뭔가 하려는 의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떠한 열정도 다했다. 시청 업무에 바쁜 이에게 이미 그런 것은 없다. 겉으로는 매우 바빠 보인다. 그런 그에게는 이 자리를 지켜 나가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은 걸까?’

 

노년의 공무원인 주인공은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하는 일은 도장을 찍는 일 밖에 없지만, 바쁜 척을 해가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애를 키워왔습니다.

 

그는 30년 무결근을 한 달 앞두고 시청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으로 갔습니다. 검사 결과 기다리던 중, 의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아저씨로부터 의미심장한 말을 듣습니다. ‘저 남자 있죠. 말은 궤양이라던데 제가 보기엔 암 같아요. 아주 심각하죠. 암이라고 하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니까. 의사가 궤양이라고 둘러 댔나 봐요. 수술도 필요 없다고 하고. 뭐든 먹을 수 있다고 하면 길어야 1년이더라고요.’ 주인공은 절망에 빠진 채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그의 이름이 불리자 진료실에 발길을 옮깁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의 첫 말은 ‘가벼운 궤양입니다.’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진실을 알려달라는 주인공의 말에 의사는 꿋꿋하게 거짓을 말합니다.

 

 

죽음을 받아 든 그는 평소 같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5만 엔이라는 거액(당시 집을 사려면 50만 엔이 필요했다)을 인출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가지 않던 술집에 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자 어디서 인가 술상대를 해주는 아저씨가 나타납니다. 그에게 지금 심정을 털어놓자 이런 말을 해옵니다.

‘불행이란 아름다운 거죠.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치니까. 암이 삶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꿔놨어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야 삶에 감사해하죠. 어떤 이들은 그것조차 못하고요. 지금까지는 노예였지만 이젠 주인이잖습니까. 주어진 삶은 그저 흘려보내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에요.’

 

라며 지금껏 낭비한 시간을 돌려놓으러 가자며, 함께 어딘가로 가기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도박장, 술집을 전전하며 밤을 새우게 됩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자신과 같은 과에 일하는 여직원을 길에서 마주칩니다. 퇴직서에 도장이 필요하다며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죠. 집에서 도장 찍어주고, 여직원의 스타킹에 구멍이 나 있을 것을 보고 스타킹을 사러 백화점에 같이 향합니다. 스타킹도 사주고 밥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둘. 그렇게 인형 제조공장에서 여직공 일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건강함과 생명력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뭔가를 창조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자리.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던 서류더미 속에서 일거리를 찾아냅니다. 시민관에서 맡아야 했던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어 달라는 민원을 다른 과에 찾아가 보라며 미뤄왔던 그간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우리 과에 진행해 보자며 자신 있게 말하는 그. 주변에서는 만류하지만, 적극적으로 진행해 공원 설립이라는 목표를 이뤄냅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은 5개월 뒤인 그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와타나베가 없었다면 공원이 설립될 수 조차 없었던 그간의 현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공로를 챙기려는 부시장 앞에서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준공식에서도 구석 자리를 안내받으며 그동안의 노력을 외면받았습니다. 그랬던 그는 준공식 후 공원에서 눈을 맞으며 죽었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공로가 돌아가는 허무주의로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장례식장에서 와타나베의 모습을 보고 배우자며, 바뀌어 나가자며 부르짖지만, 시청에 돌아오자 놀랄 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감상평

‘상자 하나 치우는데도 그 상자를 꽉 채울 만큼의 서류가 필요하다니까.’

이 대사만큼 관료주의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대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관료주의의 무능한 현실을 풍자하고,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유한하며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무의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불행이란 아름다운 거죠.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치니까. 암이 삶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꿔놨어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야 삶에 감사해하죠.’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치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불행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존재이기 때문이죠. 당장 내일 죽는다면 회사에 나갈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불행이 드리워지기 전의 삶의 우선순위와 불행이 드리워진 후의 우선순위가 일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불행이 아니고서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허무한 인간의 존재를 여실 없이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죽음에 순응하여, 사소함 속에 숨겨진 즐거움을 찾고자 시청에 출근하여 마지막을 맞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삶이라는 찰나의 순간 속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