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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In the mood for Books

호밀밭의 파수꾼 :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

11월호: 퀘벡에는 뭐가 있을까?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 주인공 홀든의 거침없는 언변은 세상에 가득 찬 허례허식과 가식을 고발한다.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삼으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가를 넘어서서 우리의 선입견과 세상의 존재방식을 규정짓는 사회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스토리

이야기는 홀든 콜필드가 정신병원에서 지난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들 회상하며 시작된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지점은 내가 펜시 예비학교를 떠나던 날이다. 펜시 예비학교는 펜실베니아주 에이저스타운에 있는 학교다. 광고는 봤을 거다. 한 천 가지 잡지에 광고가 실리는데 늘 말을 타고 담장을 뛰어넘는 잘나가는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펜시에서는 늘 폴로만 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근처에서 말이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을뿐더러, 광고에 실리는 글귀인 ‘우리는 1888년부터 어린 소년을 명석한 사고 능력을 갖춘 훌륭한 청년으로 양성해 왔습니다.’ 다른 모든 학교와 마찬가지로 펜시에서도 빌어먹을 양성하는 일 따위는 하거나 그런 인간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펜시에는 사기꾼이 가득했다. 꽤 많은 애가 엄청난 부잣집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사기꾼으로 가득했다. 학비가 비쌀수록 사기꾼은 더 많다 - 농담이 아니다.”

 

그는 예전 학교의 역사 선생님인 스펜서의 집에 향하고 있다. 그의 수업에서 낙제를 받은 것과 퇴학 당한 것에 관해 설교를 하는 그에 대해, 죽으면 죽었지 십 분도 더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 그 자리를 즉시 뜬다.

 

스펜서를 떠나온 뒤 기숙사로 돌아온 그의 기분은 아주 좋았다. 돌아온 기숙사에는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룸메 워드 스트래들레이터 그리고 로버트 애클리 - 치아가 엉망이며 옆방에 살았는데 단 한 번도 녀석이 이를 닦는 걸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엉망인 아이였다.

 

룸메 스트래들레이터는 부모가 졸업 앨범에서 사진을 보다가 바로 ‘얘 누구냐’하고 물어보는 종류의 잘생긴 녀석이었다. 그는 그날 밤 여자와 데이트를 하러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 홀든에게 역사 수업의 과제를 대신해달라고 하는 부탁을 한다. 그의 데이트 상대는 제인 갤러거로 소꿉친구였다. 홀든은 그 누구보다도 제인이 신경 쓰였다.

 

이후 돌아온 스트래들레이터와 사소한 주먹다툼이 있었다. 그다지 거창한 이유로 싸운 것도 아니다. 역사 숙제와 별것도 아닌 제인과 관련된 일이 신경 쓰여 먼저 주먹을 날렸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렇게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바닥에 누워있고 스트래들레이터의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그의 가슴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모두 잠들었거나 외출했거나 주말을 맞아 집에 갔기 때문에 복도는 아주, 아주 조용하고 우울했다.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고 외로워지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의 호텔에 방을 잡고 그냥 수요일까지 느긋하게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는 아마도 화요일이나 수요일이 되어야 홀든이 학교에서 잘렸다는 서머(교장)의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뉴욕에 도착한 홀든은 자기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 특히 여자-에게 늦은 밤 전화를 돌리며 우울함과 고독함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밤거리를 배회하던 그가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엘리베이터 보이가 매춘을 권유한다.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지만 그에겐 매춘을 할 용기는 없었다. 아가씨에게 둘러대며 5장의 돈을 쥐여주고 돌려보낸다 - 원래는 10장이다. 다음날 아침 엘리베이터 보이와 아가씨는 다시금 돌아와 그에게서 5장을 더 갈취한다.

 

다음 날에도 공허함에 젖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 그러던 와중 그가 폐렴에 걸려 죽는다면 피비(홀든의 여동생)는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치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애는 그를 무척 좋아한다. 정말 그렇다. 어쨌든 그걸 마음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가 하겠다고 생각한 것, 그는 몰래 집에 들어가 그 애를 보는 개 낫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한 시간쯤 뒤 그는 피비 방에 이르렀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책상의 램프를 켰다. 피비는 잠을 깨지도 않았다. 마침내, 아이를 깨웠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나누던 와중, 피비는 그가 학교에서 또다시 쫓겨났음을 깨달았다. 왜 그런 거냐는 질문에 백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며 지금까지 그가 느낀 가식과 속이 없는 허상에 대한 환멸의 감정을 설명한다.

 

“다른 걸 대봐. 되고 싶은 걸 말해 봐. 과학자라든가. 아니면 변호사나 그런 거라든가.” 피비가 물었다.
“나는 과학자가 될 수 없어. 과학을 못해.”
“그럼 변호사 - 아빠나 그런 사람처럼.”
“변호사는 괜찮아, 내 생각으로는 -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매력이 없어. 그러니까 늘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이나 그런 걸 구해주고 돌아다니거나 그러면 괜찮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야. 하는 일이라고는 돈을 많이 벌고 골프를 치고 브리지 게임을 하고 차를 사고 마티니를 마시고 거물처럼 보이는 거뿐이야. 또 게다가. 설사 실제로 사람들 목숨이나 그런 걸 구하며 돌아다닌다고 해도 자기가 정말로 사람들 목숨을 구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끝내주는 변호사가 되어 빌어먹을 재판이 끝나면 법정에서 모두가, 기자와 모든 사람이 등을 두드리며 축하해 주는 게, 더러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해 주는 게 좋아서 그렇게 한 건지 어떻게 알겠어? 자기가 그러는 게 가식이 아니란 걸 어떻게 알겠어? 여기서 문제, 그걸 모른다는 거야.“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을 하는 거지. 만일 꼬마들이 절벽을 넘어가려 하면 내가 모두 붙잡아야 해- 그러니까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나가 꼬마를 붙잡는 거야.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하지만 그게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유일한 거야.”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서부로 떠나기 전 피비를 보기로 한다. 문방구로 가서 편지지와 연필을 사서 피비가 다니던 학교 사람에게 그의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가 학교를 배회하던 와중 누가 벽에 욕설을 적어 놓은 것을 보고, 다른 어린아이들이 그걸 보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고, 어쩌면 심지어 걱정까지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낙서를 지웠다.

 

이후 박물관 앞에서 피비를 본 그는 같이 떠나겠다는 피비를 만류하며 그가 이곳에 남겠다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결말로 끝을 맞이한다.

 

감상평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홀든의 거침없는 언변은 세상에 가득 찬 허례허식과 가식을 고발한다.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삼으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가를 넘어서서 우리의 선입견과 세상의 존재방식을 규정짓는 사회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는 홀든 콜필드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결말을 맞는 일은 우리 세상이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암울한 현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당시의 사회는 홀든 콜필드를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작금의 세태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의사, 판사, 검사와 같이 ‘사’가 들어가 직업들을 마치 최고의 직업인 것 마냥 묘사한다. 하지만, 적어도 고등학생 때 만난 모두에게 사랑받는 교사 한 분의 생각만큼은 달랐다. 변호사, 판사, 검사. 법적, 사회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을 마주쳐가며 일해야 한다. 의사. 신체적 정신적으로 불편함과 문제를 지닌 사람들을 매일 같이 마주쳐야 한다. 교사, 그에 반해 순수함과 희망으로 가득 찬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일할 수 있다.

 

돈과 명예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에게 교사는 선호하는 직업이라고 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철학이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주기 마련이다. 마치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받아드린다면, 평생을 그 생각 안에 갇혀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세상과 우리는 기성세대들의 가식과 편견이라는 큰 틀에 갇힐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들의 생각에 반한다면, 그것은 틀리고 잘못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도 사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필연적이다. 적어도 상반되는 두 개의 세상 모두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시선이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